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산함 사건 (문단 편집) ===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갈등 === 공산당의 북벌 반대에 분노한 장제스는 2월 1일 국민혁명군 총감 임명을 거부하고 2월 2일, 광저우 위수사령관 및 군사위원회 위원 자리도 사직하겠다고 나섰다. 왕징웨이가 이에 답하지 않자 2월 27일, 장제스는 왕징웨이를 찾아 사직서의 수리와 북벌에 반대하는 키산카의 귀국 중 택일하라고 요구했다. >"혁명의 실권을 소련인의 손에 넘길 수는 없습니다. 코민테른과 제휴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한계가 있어야 하며, 자주적인 입장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장왕관계의 악화는, 단순히 귀 얇은 왕징웨이가 키산카 등 소련 고문의 말에 혹하여 북벌을 외면한다는 장제스 측의 주장보다는 더 복잡한 정황이 있었다. 당시 국민당 내부에서 장제스가 가장 강력한 군사실력자임을 사실이었으나 [[탄옌카이]], [[리지선]], [[주페이더]]을 비롯하여 무시할 수 없는 군사실력자들이 존재했다. 왕징웨이는 이들 사이를 중재하며 권위를 행사하곤 했는데 이는 자신의 군사적 기반을 장제스에게만 의존할 수 없었던 왕징웨이가 여러 군사실력자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게다가 왕징웨이는 이러한 군사적 권위의 확보를 키산카와 협력해서 행했고 장제스는 왕징웨이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노하며 그 의도를 의심했다. 2월 중순, 장제스는 정치적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하기로 결심하고 이 문제를 왕징웨이와 상의했다. 왕징웨이는 소련 외유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장제스는 문건을 정리하고 여행비를 홍콩 달러로 환전한 다음에 부두로 향했다. 그때 차 안에서 비서 천리푸가 어째서 광저우에 머무르지 않은 상태에서 이 난관을 타개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이에 마음이 바뀐 장제스는 집으로 가자고 했다가 다시 차를 부두로 향하게 했다. 그러자 천리푸가 강하게 물었다. >"만일 우리가 떠나면 누가 사령관 직책을 이어받습니까?" 장제스는 이번에는 단호하게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장제스는 자신이 소련 외유를 취소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이때, 만일 내가 광동을 떠나지 않으면 뜻밖의 사건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사직이 정식으로 승인되지 않았다. 만일 스스로 광동을 떠나면 직무를 포기하고 달아난 죄를 입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친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소련이 합작하여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충돌이 격화된 사건은 왕마오궁(王懋功) 사건이었다. 원래 왕마오궁은 쉬충즈의 부하 출신으로, 쉬충즈 숙청 이후 제1군 2사단장에 임명되었는데 장제스는 그를 광저우 위수사령관 대리로 임명할 정도로 신뢰했었다. 그런데 왕징웨이와 키산카가 왕마오궁에게 접근하여 그에게 3만원의 군비를 지급하자 격분한 장제스는 왕마오궁이 키산카의 사주로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고 주장하며 2월 26일, 왕마오궁을 체포하여 2사단장 자리에서 해임했다. 배경한 교수는 왕마오궁 사건을, 장제스가 왕징웨이에게 보내는 경고로 해석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